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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화정 이야기<글은 스크랩해온것임>

주니워커(Junie Walker) 2012. 3. 29. 01:06

 

명 칭 :  체화정(棣華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 2리 447
건 축 주 :  이민적(李敏迪, 1663~1744)
건축시기 :  조선 효종 때(1649~1659)
소 유 자 :  이헌석(관리자 : 이헌석)
문 화 재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 1985년 10월 15일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처음 정자 앞의 연못을 조성할 때 삼신선산[三神仙山]을 상징하는 인공 섬 3개를 만들었으며 그 섬들에 삼신산의 이름을 따라 방장(方丈)·봉래(蓬萊)·영주(瀛洲)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삼신산의 이름을 붙인 것은 삼신산의 선계(仙界)와 불로불사 (不老不死) 이미지를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

건축 배경
이민적이 효종 때 학문을 닦기 위해 건립하였다.

건축 특징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이다.

일반적으로 방 앞쪽에 퇴칸을 두는 경우 칸살을 방보다 작게 잡는 것이 일반적인 법식이라면 여기서는 동일 주칸으로 잡아 3칸 마루를 들이고, 후편 쪽 어칸에 온돌방 1칸을 두면서 좌우 퇴칸에 마루방을 들인 독특한 간잡이법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인 정자 평면은 중당협실형이거나 판상에 사면을 개방시킨 것이 일반적인 예이나 이 정자는 색다른 평면을 구사하고 있으며, 사면엔 계자난간을 둘러 전면의 연못을 바라보면서 여유를 즐기기에 적합하도록 배려하였다.

양쪽 마루방 상부는 우물반자의 눈썹 천정으로 마감되고 전면은 3분합들문에 상부에 살창을 얹었다. 온돌방과 양쪽 마루방과는 4분합들문을 만들어 필요시 6칸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확대할 수 있는 창호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온돌방 전면 창호는 3분합들문으로 중앙 문엔 또 다시 작은 여닫이를 만들었다.

마루방 외벽은 모두 판벽으로 마감하였고, 배면과 측면 쪽은 쌍여닫이 골판문을 달았다. 그리고 전면 마루 좌측·우측에도 판벽과 골판문을 달아 전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 부공간의 아늑함도 기하였다. 진입은 전면 우측으로 오르게 계단을 두었으며, 아궁이는 어칸 마루 하부에 설치하였다.
초익공 5량가이나 살미는 선각만으로 간략하게 처리하고 봉두를 얹었다.

건립 당시의 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으며 특히 연못과 정자의 구성은 조경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건축 구성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 정자 앞의 인공 연못

현판
체화정(棣華亭)
체화정(棣華亭)의 ‘체화(棣華)’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 시 “상체지화(常棣之華)에서 따온 말이다.
상체시의 내용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것인데, 상체 ‘아가위’ 꽃에 꽃받침이 두드러져 보이듯 형제간의 사이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가깝고 친하다는 것이다.
담락재(湛樂齋)
담락재(湛樂齋)의 담락(湛樂)도 상체편 화락차담(和樂且湛)에서 따온 말이다.
화락차담이란 아무리 부부의 금실이 좋아도 형제간에 화합해야만 진정으로 즐겁고 기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담락재는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에게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안기찰방(安奇察訪)의 직책을 마치고 한양으로 가던 중에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체화정원운(棣華亭元韻)
추운(追韻)
체화정기(棣花亭記)
하지(下枝) 이상진(李象辰, 1710~1772)은 「체화정기」에서 예안이씨 만포(晩圃), 옥봉(玉峯) 형제간의 우애는 조상 여러 대에 걸쳐 대물림으로 내려온 것으로 집안의 가법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체화정중수기(棣華亭重建記)

 

누정 이야기
- 당호와 현판에 담긴 형제의 우애

현판이나 당호는 주인이 지니는 삶의 자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당호나 현판에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낼 때는 『시경』의 「상체」시에서 그 뜻을 취하여, ‘체화정’, ‘체화당(棣華堂)’, ‘사체정(四棣亭)’ 등과 같이 붙인다고 한다.

체화정이라는 정자의 이름과 담락재라고 하는 현판에는 정자의 주인이었던 이민적(李敏迪, 1663∼1744)과 그 형 이민정(李敏政)의 우애가 그윽하게 담겨 있는 것이다.


- 이민적의 시

늙을수록 나는 속세 인연 끊고 싶어 / 老來我欲斷塵緣
물을 끌어 오고 바위에 기대어 몇 기둥을 얽었네 / 並水依巖結數椽
고요한 빈터 연기 나무에 갇히어 푸른빛 띠고 / 寂歷墟煙籠樹翠
차가운 밤 달빛은 주렴에 들어 아름답네 / 蒼寒夜月入簾娟
동북쪽의 창가에선 산을 보고 읊조리고 / 快牕東北看山詠
일상의 베갯머리 여울 소리 들으며 자네 / 幽枕尋常聽瀨眠
일찍이 그간의 많은 취미 아노니 / 早識這間多趣味
이십여 년이나 헛되이 달리려고 했네 / 肯敎虛走卄餘年


- 이민정의 시

사람에게 좋은 땅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아 / 勝地於人似有緣
하늘이 아껴두어 오늘에야 새 기둥 빛나네 / 天慳今日煥新椽
마을은 또렷하게 시내를 따라 들어섰고 / 村家歷歷沿溪住
늘어선 산들은 겹겹이 눈에 들어 아름답네 / 列峀重重入眼娟
달이 처마 끝에 떠오르니 하늘은 읊을 만하고 / 月上簷端霄可詠
바람이 못 수면에 부니 한낮에 잠자기 적당하네 / 風生池面午宜眠
늙을수록 한가로워 일없음을 아노니 / 自知老去閑無事
아우는 노래 부르고 형은 화답하며 노년을 보내리 / 弟唱兄酬送暮年


위 시에는 만년에 속세의 번다한 인연을 끊고 한적한 곳에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한 삶을 구가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형 이민정의 시구에 아우가 부르면 형이 화답한다고 하는 ‘제창형수(弟唱兄酬)’란 말은 형제간의 소박한 우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 시구에 나타나는 풍광이야 변한 세월만큼이나 다시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정신만은 정자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이한오의 지극한 효성
용눌재 이한오는 아버지가 민물고기를 즐겨서 날마다 5리 길이나 떨어져 있는 큰 강에 나아가 고기잡이를 하였다. 어느 날 캄캄한 밤에 그물을 쳐 놓고 나오니 큰 호랑이가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얼떨결에 모래로 몸을 가리고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호랑이는 다가와서 주위를 몇 바퀴 돌더니 그냥 사라져 버렸다.

한번은 일찍이 병석에 있는 어머니가 갑자기 꿩고기를 찾았는데, 그때 문득 꿩 한 마리가 날아와 채마밭 가운데에 떨어졌다. 그를 잡아다가 대접하여 어머니의 입맛을 되찾게 해 주었으며, 그로 인해 병이 곧 회복되었다 한다.


관련인물
- 이민적(李敏迪, 1663∼1744)

체화정의 첫 주인은 만포 이민적이다.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혜숙(惠叔)이다.

1744년(영조 20)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백형(伯兄)인 이민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만년에 남쪽 언덕의 모퉁이에 정자를 짓고, 그 앞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어 물을 끌어다 물고기를 길렀으며, 그 좌우에다 이름난 꽃을 빙 둘러 심어놓고, 백형 옥봉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거처하며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 이한오(李漢伍 , 1719~1793)
만포 이민적이 죽은 후,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 , 1719~1793)가 체화정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순국한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1528~1594)의 8대손이며, 이민정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결혼한 뒤에도 내실에 거처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어버이 곁에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용눌재는 1812년(순조 12)에 그 효성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으며, 풍은공은 한 해 전인 1811년에 그 충의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다.

지금도 체화정 길 건너 맞은 편 동네인 하리에는 풍은공 종택인 충효당(忠孝堂)이 있고, 충효당에는 별당으로 쌍수당(雙修堂)이 있다. 이 충효, 쌍수라는 이름이 풍은공 이홍인의 충의와 용눌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체화정은 주변의 풍광만을 누리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예안이씨 일가의 효성과 우애와 충의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안동 > 풍산권 > 상리
- 풍산읍의 위쪽에 자리 잡은 마을
풍산읍의 위쪽에 있다고 해서 상리라고 부른다. 원래 이 지역은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안동군 풍산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안부리의 일부와 서선면의 하리, 서후면의 대두서리 일부를 합하여 상리리라 하였다. 1934년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로 되었다.

상리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고, 상리 1리는 우렁골[芋洞], 신구실·종송(宗松), 새못골 3개 마을, 상리 2리는 시묘골[侍墓谷], 장터, 삼강당 3개 마을, 상리 3리는 권산정(權山亭)·권산지, 회촌(回村)·도린마 2개 마을로 되어 있다.

우렁골은 전의이씨(全義李氏)와 예안이씨(禮安李氏)의 450년 세거지(世居地)이다. 학가산의 한 지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 풍산읍의 동쪽을 에워 두른 하지산(下枝山)과 와우산(臥牛山)을 배산으로 하고 굽이쳐 흐르는 곡강을 임수로 한 곳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없지만 고려 때 우농사(芋農寺)란 큰 절이 있어서 우렁골이라 불렀다 한다.
신구실은 우렁골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고 잘 가꾸어 종송이라 하였다. 풍산읍에서 상리천을 건너 수리로 연결되는 지방도로 초입에 형성된 마을이다.

시묘골은 조선 명종 때 선비 김시좌(金時佐)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다가 돌아가시자 묘막(墓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권산정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오동정(梧桐亭) 권안세(權安世)의 증손 권구(權耈), 권기(權耆), 권질(權耋) 3형제가 각각 나무 한 그루씩을 심고 정자를 지어 그 정자 이름을 삼수정(三樹亭)이라 하였다. 삼형제는 부모의 거상(居喪)에 여막을 지어 시묘하며 지극히 애통해 하였으므로 그 지극한 효성이 널리 알려졌다. 때마침 고관의 행차가 앞을 지나다가 삼형제가 정성을 다해 시묘하는 모습을 보고 상제(喪制)의 효심에 감동하여 여막에 권상정(權喪亭)이라 써서 붙여놓고 갔다는데 유래한다. 현재 정자는 소실되고 그 이름만 남아 보통 권산정으로 부르고 있다.

회촌은 도린마 서북쪽 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상리천(上里川)이 이곳에서 돌아간다고 하여 도린마라 하였다.

앙겟골에는 예안이씨의 재실(齋室)이 있는데, 묘지기의 아내가 시루떡을 하다가 떡이 설었다는 꾸중을 듣고 자결한 후부터 제사에 시루떡을 쓰지 않고 절편을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http://blog.daum.net/kil0930/414?srchid=IIM5IN4L100#A2006720D4CA1E49272F4E8  에서 스크랩 해온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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